본문: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창세기 11장 25-32절)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 살펴볼 것은 데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의 중요성 때문에 오늘 본문을 간과하는 우를 범하기 쉽습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아브라함이 주도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분명히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났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은 아브람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성경의 장과 절의 구분은 처음부터 구분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장, 절, 제목 등은 후대에 붙여진 것입니다. 즉, 성경의 내용과 달리 제목이나 장, 절의 구분은 성경의 영감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약과 구약의 장, 절의 구분은 시차를 두고 이루어졌는데, 신약의 장 구분이 4세기에 시작되었고, 10세기에 구약의 절 구분이 장보다 먼저 이루어 졌으며, 13세기에 구약의 장 구분이, 16세기에 와서야 신약의 절 구분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과 같은 신구약으로 처음 출판된 것은 1555년 스테파누스의 불가타 성경이고 오늘날과 같은 장, 절의 구분은 1560년에 출간된 제네바 성경입니다. 그리고 이 구분이 오늘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장, 절 구분을 언급하는 이유는 데라의 족보와 아브람의 부름이 장으로 구분되어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데라의 족보와 아브람의 부름을 연결지어 이해할 때 우리는 더 많은 이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 가장의 역할은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족의 생사 여탈권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의 권위에 아무도 도전할 생각을 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이 역사적 시대상을 이해하고 본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셨지만, 아브람이 데라에게 속해 있을 때에는 데라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신 명령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아브람이 아니라 데라였다는 사실입니다. 데라는 아브라함을 신뢰하고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로 결정했는데 그 결정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기반을 놓고 전혀 알지 못하는 땅, 자신을 보호해 줄 어떤 세력도 존재하지 않는 땅으로의 이전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모든 가족들을 데리고 그들의 생명을 책임지며 가야 합니다. 그리고 데라가 가고자 하는 지명을 '가나안'이라고 정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터전을 뒤로하고 그들은 가나안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하란에 이르러 더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거류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말의 의미는 그곳에 정착하려고 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가야할 곳이 정해졌는데, 가는 중에 도착지가 변경된 것입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하란'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하란'은 비옥한 초생달 지대의 서쪽 모래톱 위쪽에 위치한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상업 도시입니다. 하란은 같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공유하고 있는 마지막 경계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데라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떠나라는 명령을 받은 아브람을 신뢰하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까지는 왔지만, 이 경계를 넘어서 나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하란에 정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데라는 자신이 정착을 결정한 하란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본문은 의도적으로 데라의 죽음 이후에 아브람이 하란을 떠났다고 읽혀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읽혀지도록 요청된 것이라면 데라의 죽음 이후 아브람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명령은 데라의 유산 중 자신에게 주어질 몫의 유산을 받지 말고 떠나라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그 명령에 순종합니다. 아브람은 고향인 갈대아 우르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주는 모든 혜택과 영향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모든 유산 상속을 뒤로하고 새로운 땅으로 가는 여정은 과거를 완전히 정리하고 가야만하는 상황을 암시하고 있어 아브람의 이야기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아브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12장 아브람을 부르신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가나안 땅으로 가지 않은 것은 데라의 불순종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불순종은 죽음을 불러온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이를 통해 아브라함의 순종이 얼마나 대단한 결정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문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사래의 불임에 대한 기록입니다. 분명 본문은 '사래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은 여자의 후손을 통해 이루어질 것인데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부르신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불임이라면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주목하게 합니다. 즉, 아브라함으로 불릴 아브람 이야기가 아브람을 통해 이어질 여자의 후손이 어떻게 사래를 통해 성취할 것인가에 주목하라고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반적인 역사의 기록이 아닙니다. 영웅들의 영웅담을 모아놓은 기록도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기록은 '누가 여자의 후손인가?'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를 주목하며 성경의 기록을 읽어가면 하나님의 세밀한 간섭과 약속을 성취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는 사래의 불임은 한 개인의 고통이나 한 가정의 어려움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대한 불안과 기대를 동시에 형성합니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여자의 후손'의 탄생을 통해 성취됩니다. 그런데 언약의 성취를 위한 계승자로 지목된 아브람과 사래가 불임이라는 사실은 언약의 성취가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 지점, 하나님의 약속과 현실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믿음이 출발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사래의 불임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의 능력이나 가능성에 근거하지 않음을 아주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앞으로 전개될 아브람과 사래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불가능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시는 지, 약속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살펴보면서 인간의 절망을 은혜의 통로로 바꾸어 가시는 복음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집트의 노예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매우 큰 울림을 가져다 주었을 것입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광대한 수메르 문명을 뒤로 하고 아브라함에게 떠나라는 명령을 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이집트 문명을 뒤로하고 떠나게 만드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책임지시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언약을 성취하신 하나님께서 우상의 문화를 완전히 정리하고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불러내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고향과 아비 집을 떠나게 하여 완전히 새로운 삶을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자신들에게 이집트를 완전하게 떠나게 하여,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몸소 경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선 이스라엘에게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너무 많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의, 식, 주 문제를 비롯해서 앞으로 겪게 될, 수 많은 전쟁들과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땅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는 이스라엘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현실적인 불안과 두려움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기원이 하나님의 은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큰 위안과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전수로 이어져 확장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능력의 기적을 수반해서 태어난 민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며 자신들의 삶에 개입하시고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게 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과 자신들이 생각하는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간섭으로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는 소망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향해 반역하는 삶을 완전하게 정리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을 과거로부터 단절시키셨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우리가 죄와 사망의 다스림 안에 살았던 과거와 단절시키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는 현실에서 매우 큰 아픔과 고통을 수반합니다. 평안함과 모든 안전이 사라져버리는 경험을 수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새롭게 하시고 아브라함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통해 일하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임의 상황을 역전시키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능성을 보고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언약을 성취하시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합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이 은혜였듯이 오늘 나를 구원하심도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의 여정을 통해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세우신 것처럼 내가 살아가는 삶의 여정을 통해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 그리고 믿음의 선조들의 삶을 통해 사람이 해낸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를 만들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도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는 하나님, 사래의 불임을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여러 상황들을 믿음으로 극복해 나가는 복된 한 날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더 깊은 묵상을 위한 질문들.
1. 하나님의 부르심이 삶을 흔드는 경험을 수반하게 될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온전히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까요?
2. 데라와 같이 안주하고 멈추어 서고 싶을 때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결단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3. 지금 삶의 현실이 '불임'의 상황 가운데 놓여 있을 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어떻게 확신하며 평안함을 누릴 수 있을까요?
묵상을 위한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의 무능함과 가능성 없는 상황 속에서도 일하시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믿습니다. 사래의 불임 가운데서도 언약을 이루어 가신 것처럼, 저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내가 걸어가는 믿음의 길 가운데 익숙하고 편안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계속해서 나아가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고, 멈춰 섰던 자리가 있다면 다시 일어 서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