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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 107 중보적 존재: 타인의 비극을 사명으로 받는 마음(창세기 14:12–13 중심으로)

  • 관리자
  • 7시간전

본문: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 제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을 쳤더니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창세기 14:1-12절) 

 

이야기는 롯이 사로잡혔다는 비참한 소식에서 멈추지 않고, 곧바로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라고 기록하며 장면을 전환합니다. 아브람은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었으며, 비옥한 땅을 찾아 떠난 롯과 갈라선 채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타인의 비극을 ‘소식’의 형태로 아브람의 장막에 던져 넣으심으로, 그를 안락한 일상에서 끄집어내어 고통받는 자를 위한 중보자로 세우십니다.

 

성경은 아브람을 굳이 ‘히브리 사람’(הָעִבְרִי, ha-ivri)이라고 지칭합니다. 이는 주변의 가나안 민족들과 구별된 정체성을 가진 자, 즉 ‘강을 건너온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세상의 전쟁과 갈등 속에서 그저 구경꾼으로 남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는 비록 나그네였지만, 세상의 깨어진 틈 사이에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대행해야 할 거룩한 책임을 부여받은 존재였습니다.

 

역사문화적으로 이방인 아브람이 강력한 제국 연합군에 대항하여 전쟁에 뛰어드는 것은 자살 행위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롯이 겪은 불행을 “남의 일”로 치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롯이 선택한 세속적인 삶의 결과를 비난하기에 앞서, 그가 ‘나의 형제’라는 사실에 집중했습니다. 중보자란 타인의 실수와 연약함까지 자신의 고통으로 안고 주님 앞에, 그리고 세상 앞에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나만 복 받는 삶’에서 ‘나를 통해 남이 복 받는 삶’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들려온 롯의 소식은 그의 신앙이 얼마나 이타적인지를 시험하는 영적 리트머스 시험지였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 주변의 깨어진 소식들을 우리 귀에 들려주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그들을 위한 복의 통로와 중보적 리더로 부르시는 소명입니다.

 

세상은 “네 코가 석 자다”, “네 인생이나 잘 챙겨라”고 말하며 우리를 개인주의의 감옥에 가둡니다. 그러나 성경은 타인의 비극을 나의 사명으로 해석하는 ‘중보적 서사’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아브람은 롯의 포로 됨을 자신의 일처럼 아파하며 일어섰습니다. 우리는 주변의 아픈 소식들을 들을 때,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정죄의 이야기를 버리고 “내가 어떻게 도울까”라는 은혜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닮아가야하는 그리스도의 형상은 원수 된 우리를 위해 친히 고난의 현장으로 뛰어드신 중보자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안락함을 뒤로하고, 죄와 사망의 포로가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의 거친 전쟁터로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실수를 책망하기보다 우리의 사슬을 끊어주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중보적 존재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세상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주제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사도의 권면으로 완성됩니다. 아브람은 롯과 땅 문제로 갈라섰지만, 사랑의 끈은 놓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위대한 기업이 ‘땅’이 아니라 ‘사람’임을 아브람의 결단을 통해 보여줍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이 바로 아브람이 가졌던 중보자의 마음입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우리의 귀에 들려온 그 소식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기도의 제목으로 올라온 누군가의 아픔, 뉴스에서 접하는 소외된 이들의 비명, 직장 동료의 남모를 눈물 등 하나님은 매일 우리에게 수많은 ‘롯의 소식’을 들려주십니다. 그 소식들을 단순한 정보로 흘려보낼 것인지, 아니면 나를 부르시는 소명으로 응답할 것인지가 우리의 영적 수준을 결정합니다.

 

오늘 우리의 상수리 수풀 아래로 찾아온 불편한 소식은 무엇입니까?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소식이 들리는 거야”라고 짜증 내기보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라고 물으십시오. 우리가 그 소식을 붙잡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때, 혹은 구체적인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우리는 비로소 ‘히브리 사람 아브람’처럼 세상 속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중보적 리더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새로운 아침이 주어졌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지평을 넓힐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와 내 가족의 안위만을 구하던 좁은 시야를 거두고, 포로 된 자들과 상처 입은 이웃들을 향해 눈을 들어야합니다. 우리의 작은 관심과 기도가 누군가에게는 다시 살 소망의 소식이 될 것입니다. 중보자로 부름받은 우리의 사명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도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복된 주님의 동역자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묵상질문]

1. 하나님은 왜 아브람이 직접 전쟁을 보게 하지 않으시고 ‘도망한 자의 소식’을 통해 전쟁에 참여하게 하셨을까요?

2. 나는 주변의 아픈 소식을 들을 때 그것을 '나의 사명'으로 여깁니까, 아니면 '불편한 정보'로 여깁니까?

 

[적용 질문]

1. 최근 내 주변에서 들려온 '롯의 소식'(누군가의 어려움이나 슬픔)은 무엇이며, 나는 그 소식에 어떻게 반응했나요?

2. 그 영혼을 위해 오늘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중보의 행동(기도, 연락, 물질적 도움 등)은 무엇입니까?

 

[묵상기도] 

중보자 되신 주님, 저의 닫힌 귀와 눈을 열어주셔서 이웃의 아픔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저만의 평화로운 일상에 안주하지 않고,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기꺼이 기도의 무릎을 꿇고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중보적 존재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제게 들려주신 소식들을 사명으로 받게 하시고, 저를 통해 깨어진 관계와 영혼들이 회복되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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