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36 다른 씨.

  • 관리자
  • 2026.06.15 06:59

본문: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세기 4장 23-26절)

 

오늘 살펴볼 본문은 라멕의 노래와 셋의 출생을 기록한 부분입니다. 라멕의 노래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 문화의 잔인성과 무절제한 보복이 잘 드러납니다. 한글로 번역된 '나의 상처'는 타박상, 부상으로 번역할 수 있는 심하지 않는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나의 상함'으로 번역된 단어도 매질, 채찍 등에 의한 상처로 죽음에 이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라멕은 이런 자그마한 상처로 사람을 죽이고, 소년이 이러한 상처를 입혔다고 그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반역하여 자신의 성을 쌓고 시작한 가인과 그의 후손이 이룩한 사회는 점점 폭력적인 사회로 강화되고 있음을 라멕 시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라멕은 사람을 죽이는 데 전혀 거리낌을 느끼지 않으며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잔인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라멕은 상대방의 폭력에 대해 필요 이상의 폭력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살인을 정당방위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사회는 일반적인 폭력과 정당방위의 폭력을 다르게 취급하고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폭력이 점차 강화되고 확대되어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었기에 이에 대한 법적인 장치들도 많이 발전하여 정당방위가 인정되고 있던 사회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라멕도 진짜로 자신이 정당방위로 한 것이라고 믿고 노래한 것입니다.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신이 보기 좋은 대로 살아갑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타인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합리화하며 그 억압과 착취를 토대로 발전합니다. 법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법 또한 힘 있는 자들은 통제 밖에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힘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법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법 아래의 평등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평등은 라멕의 경우와 같이 힘 있는 자들의 복수를 저지하는 것에 무기력합니다.

 

법은 악이 공동체에 더 이상 확장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공동의 약속입니다. 악을 제거하고 제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래서 힘  없는 자들은 법대로 하자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힘이 있으면 법을 가지고 자신의 힘을 드러냅니다. 자신의 복수를 법으로 정당화하고 상처 이상의 강력한 복수를 법으로 뒷받침합니다. 여기에 법의 한계가 있습니다. 현대 사회도 이러한데 라멕 시대가 어떠했을지는 우리 모두가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라멕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정당방위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더 나아가 자신이 그 사건의 심판자로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의 벌이 7배를 더한 것은 하나님의 선고입니다. 복수를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라멕의 경우 벌이 77배인데, 이 복수를 하나님께 맡기거나 하나님이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복수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스스로가 자신의 보호자가 되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반역한 가인은 자신의 성을 쌓고, 그 후손들이 그 영역을 확대하며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켜 나갑니다. 그들의 삶이 죄와 사망의 다스림 안에서 발버둥 치지만 힘이 지배하는 사회로 발전하며 억압과 착취가 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그렇게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성경은 다른 계보를 보여 줍니다. 아담과 하와가 동침해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셋이라 합니다. 이 '셋'이 중요한 이유는 아벨을 대신하여 주신 다른 '씨' 즉 여인의 후손이라고 성경이 직접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벨 대신 주신 다른 씨인 '셋'을 통해 새로운 계보가 이어져 갑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가인을 낳고 하와는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득남하였다.". 그러나 셋을 낳고는 "하나님이 내게 다른 씨를 주셨다." 고 고백합니다. 가인을 낳고 자신이 낳은 가인을 통해 하나님의 회복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주체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애씀을 통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기대로 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절망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절망의 상황에서 셋이 출생합니다. 아마도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회복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이를 주신 것도 하나님이시고, 그 아이를 통해 일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가인의 계보와는 달리 매우 중요한 사항이 언급됩니다. 셋이 에노스를 낳고 에노스가 살던 시대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기록입니다. 이 짧은 기록은 가인의 계보와 대비됩니다. 가인의 계보를 통해 문화와 문명이 그들로부터 시작되었고 법도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에 반해 셋과 그의 후손으로 시작된 공동체는 하나님과 관련된 행적만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비로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부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추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단지 호명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족장 시대의 내용을 참조하면 그것은 예배에 대한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기도와 희생 제사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깊이 살펴보자면 가인의 계보에서 문화와 문명의 기원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이곳에서는 정기적인 예배의 기원을 언급한다고 이야기해도 틀렸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가인과 아벨 시대에도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그렇기에 에노스 이전에는 하나님을 몰랐고 예배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에노스 시대에 이르러서야 하와처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시작했다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셋의 후손들은 문명이나 문화적인 부분에 두각을 나타내는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을 부르며 예배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손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와 함께한 이스라엘은 이 이야기에 대해 많은 내용들을 경험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 압제와 학대, 착취 아래서 살았습니다. 그 당시 가장 문명화되고 최고의 문화를 일군 사회에 살았습니다. 법이 있고 질서가 있고 안전을 책임지는 군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자신들을 위해서는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착취당한 그 토대 위에 건설되는 폭력적인 사회를 경험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희망이나 소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예배하도록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이 예배자로 서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발전을 이룬 라멕의 후손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셋의 후손들을 통해 일하심을 들었습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도우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는 유일한 소망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심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발전을 통해 회복케하시고 성취 하시지 않습니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화복케 하시고 성취하십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성경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리더를 통해 일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비약적으로 발전케 하지만 그 이면에 드리운 그늘까지 통제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라멕 시대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의 희생을 가지고 발전을 도모합니다. 이런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과 함께하십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세상의 번영이 아닙니다. 첫 창조의 회복이자 하나님의 창조를 완성 시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에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배하는 사람을 통해 완성해 나갈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한 날도 세상을 위해 헌신하고 세상의 번영과 발전에 나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첫 창조의 회복과 완성을 소망하며 세상이 알지 못해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회복과 완성의 성취를 맛보며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더 깊은 묵상을 위한 질문들.

1. 내 삶 속에서 가인과 그의 후손처럼 내 안전을 내가 책임지고, 내 힘과 방법으로 살아가려 하지는 않습니까?

 

2.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의지하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3. 오늘 내 삶 속에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묵상을 위한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내 삶에서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 살아갔던 방식과 같이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않게 하시고, 셋의 자손들처럼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내 삶이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하시고,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를 믿음으로 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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