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세기 6장 1-7절)
오늘 본문은 가인의 족보와 셋의 족보를 기술한 뒤 사람이 땅위에 번성한 상황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창세기 저자가 일관되게 전하고 있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보는 것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는 창세기를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 '보는 것'에 집중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눈'으로 볼 것인가? 창세기가 보여주는 '시각'은 매우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선하고 아름답게 세상을 다스릴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보시고 좋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좋다는 말은 선하다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창세기를 읽는 독자들은 1장의 서술을 따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보기 좋고, 아름답고, 선함을 동일하게 고백할 것을 권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 날에 지음받은 사람도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 모든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경험합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을 누리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대리해서 다스립니다. 여기에 그 어떤 부조화나 부족함이 없습니다.
3장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반역을 행하자 모든 것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선하고 아름답고 복된 세상이 죄와 악이 사람을 통해 흘러 들어왔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사람 위에 왕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는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사람이 보았지만, 인간은 반역 이후로 자기 눈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눈에 좋은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고백합니다. 자기가 좋은 것을 자기 스스로가 결정합니다. 이제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답고 복된 것과 사람이 보기에 선하고 아름답고 복된 것이 전혀 다른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정권마저 찬탈하여 스스로 왕이 되어 결정합니다.
가인의 족보는 하나님을 반역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과 멀어지는 선택을 합니다. 자기의 보기 좋은 선택이 죄와 악을 확대하고 강화하는 어리석은 선택임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쌓은 성에서 안전을 스스로 담보하며, 자신의 이름을 위해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키며 세상의 성공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나 성공적으로 보이는 세상은 점차 폭력이 난무하며 억압과 착취로 발전합니다. 이에 반해 셋의 족보는 사람의 눈에 보기에 보잘것 없고 번영과 발전을 이루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셋의 후손들이 세워가는 공동체를 통해 일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살펴볼 6장에 와서 성경의 기록에서 전혀 다른 길을 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두 공동체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창세기 6장은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라고 시작합니다. 특이한 것은 사람과 하나님의 아들들을 구분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 구분을 의도적인 것으로 본다면 사람은 가인의 후손들을 반영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들을 반영하는 서술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셋의 족보에서는 많은 자녀들을 낳았음을 유추할 수 있지만 가인의 족보에서는 자녀들의 번성을 기록으로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이것도 의도적으로 기록한 것이라면 창세기 6장에서 사람이 번성할 때라는 의미는 ‘가인의 후손이 번성하기 시작했다.’로 볼 수 있습니다. 번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입니다. 이 번성이 가능한 것은 여자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죄로 타락한 세상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복을 거두어들이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왜곡되고 온전하지는 못해도 복의 시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즉 가인의 후손들에게서도 수 많은 여자들을 통해 번성의 복을 누리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제 가인의 후손들과 셋의 후손들이 다 큰 공동체를 이루어 번성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충격적인 상황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분명 가인은 쫓겨나서 놋 땅에 거해 자신의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두 공동체가 교류할 정도로 물리적인 거리가 사라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조 때의 일들이 점차 희석되어 이제는 서로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공동체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공동체가 혈연으로 연결되는 상황으로 발전합니다.
아름답다고 번역된 단어는 창세기 1장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좋았다라는 단어입니다. 다시 번역하면 사람의 딸들의 선함을 보았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반역에서 등장하는 모습입니다. 첫 사람이 반역하여 자기가 보기 좋은 것이 선한 것이 된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는, 셋의 후손 남자들이 가인의 후손 딸들의 선함, 좋음을 보았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것은 "자기들이 결정한 모든 여자를 아내로 취했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자기들이 결정한 것이 선한 것이라는 인간의 반역의 결과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들과 교류하며 그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이유가 가인의 후손들이 하나님께 용서받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돌이켜 경건한 삶으로 돌이켰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가인의 후손의 여인들에게서 자신의 공동체에 속한 여인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그 무엇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선택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에 눈이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그 내면과 하나님을 향한 경건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경건한 자들이 세상에 확장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반역한 공동체가 온 세계로 확장되어 살아갑니다. 이 모습이 노아 시대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들 확인할 수 있습니다.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들보다 더 낫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시간의 차이만 있었지 결국 아담과 하와의 반역을 따라 자신에게 보기 좋은 것을 선하다고 결정합니다. 이러한 죄의 확장과 강화는 모든 시대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셋의 자손이 그러했고 이스라엘도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 회개가 일어났고 회복도 있었지만 그러한 시대와 공동체는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반적이지 않은 현상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주도하거나 사람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아담과 하와의 길, 그들이 선택한 반역의 길로 나아갑니다.
이렇게만 보면 사람에게 어떤 소망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절망적입니다.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된 자신이 왕이 되고자 했던 반역의 결과를 모두가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좋은 것이 선이고 그 선택을 결정하며 살아가는 세상의 결과를 창세기 6장은 단 한 줄로 기록합니다.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는 기록으로 모든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망 없는 세상에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소망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셨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시고 이루기 위해서 세상을 멸망 가운데서도 구원하시며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하게 성취되도록 역사하십니다. 그 성취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지점에 있어서는 이전 역사와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구원받은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죄가 끊임없이 우리를 하나님을 향한 반역으로 이끌어 갑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고 결정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발견하며 절망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우리 안에 구원이 이루어졌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과정을 우리가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의 악함을 알고 사람에게 소망이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고백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한 날을 살아가면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을 깊이 묵상하는 하루가 되시기 원합니다. 내 안에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내 뜻과 내 결정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결정을 실현하는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더 깊은 묵상을 위한 질문들.
1. 나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아름다운 것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2. 최근 내가 보고 좋은 그대로 결정을 내렸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3.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선택을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묵상을 위한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세상의 아름다움과 유혹이 제 눈을 가릴 때, 주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제 안의 욕심이 아닌 주님의 뜻을 따라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